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암(李明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47627
  • 전몰일자 : 19501023

공훈사항

이명암 일병은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낙동강 선까지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분연히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0년 9월 25일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동 훈련소의 조교 요원으로 배치되었다.
한편,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병력 확보와 각 지역 방위임무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7월 초순 도별로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가 대구에서 창설되었다. 그리고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으나, 7월 17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다. 그 후 8월 1일 이 교육대가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다가, 8월 14일 국본 일반명령 제46호로 대구에 육군본부 직할로서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이명암 일병이 제1훈련소에 배치될 무렵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 9월 공세를 맞이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훈련소는 창설 직후였지만 신병교육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대구 지역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활동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한 후에는 미처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대구 인근의 팔공산이나 보현산 등을 근거지로 하여 이들 빨치산들과 연계하여 후방교란활동을 계속했다. 대구에는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이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제1훈련소는 신병훈련에 주력하면서도 동시에 인근에 출몰한 적들의 유격활동에 대응해야 했다. 훈련소는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해 왔다. 10월 23일 적 게릴라들이 훈련소를 습격했고, 이명암 일병과 기동타격대원들은 이들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소탕작전에서 이 일병은 적을 추적하다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암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03판-2면-19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83-ㅂ-07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