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수(李明秀)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3698
  • 전몰일자 : 19501208

공훈사항

이명수 일병은 경기도 인천시 부평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하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2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명수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9월 중순, 제6사단은 신령 북방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단은 9월 16일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적의 방어지역을 돌파하지 못했다. 이는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그들의 후방이 차단된 것을 모른 채, 조림산 일대에서 강력히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북한군은 9월 22일 야간에 조용히 퇴각하였으며, 제6사단 장병들은 9월 23일부터 도망가는 북한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명수 일병이 소속된 제2연대는 사단의 선두에서 보은-괴산 방향으로 추격하여 9월 30일에 원주를 탈환했다. 이후 10월 5일에 춘천 북방의 모진교에서 38도선을 돌파하여 화천-김화-신고산-덕원(원산 북쪽)-마식령-양덕을 거쳐 10월 19일에 성천을 점령했다. 연대는 계속 순천-희천 방향으로 진격하여 10월 22일에 희천을 점령했다.
유엔군은 10월 25일에 압록강을 향한 제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를 시작했다. 당시 제2연대 장병들은 희천-벽동 방향으로 공격했다. 이때 중공군은 적유령 산맥 일대에 은거해 있다가 10월 25일부터 기습적으로 아군의 측후방을 차단했다. 이에 제6사단은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철수를 결심했다. 사단 장병들은 10월 27일부터 철수를 감행하여 첩첩산중에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으면서 10월 30일에 청천강을 건너 개천으로 집결했다.
제6사단은 11월 14일에 영원-덕천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2군단의 예비가 되었다. 군단은 11월 25일에 유엔군의 2차 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했다. 이명수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공격 2일차인 11월 26일에 전방에서 공격하던 제7사단이 중공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군단의 예비였던 사단이 투입되었으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단 전 병력은 상급부대 명에 의거 철수를 시작했으며, 12월 1일에 북창을 거쳐 시변리-고랑포 지역으로 철수하였으며, 12월 8일에는 고랑포 일대에서 북한군 잔적들의 기습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8판-8면-12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2-ㄹ-05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