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수(李明洙)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K1136450
  • 전몰일자 : 19530327

공훈사항

이명수 이등중사는 1926년 7월 30일에 출생했다(출생 장소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던 1950년 9월 20일,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 제3사단으로 배치되었다.
이명수 이등중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10월 하순, 미 제3사단은 일본에서 한국전쟁에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단 장병들은 11월 5일에 일본을 출항하여 17일에 원산에 상륙하여 항만과 비행장을 방호하다가 20일에 함흥으로 이동하여 흥남항 외곽방어선을 점령했다. 이곳에서 장진호전투로 피해가 컸던 미 제1해병사단을 포함하여 여러 부댕의 흥남철수작전을 엄호한 후 12월 24일에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이명수 이등중사가 소속된 미 제3사단은 부산항에 도착한 후 부대 정비를 하고 있다가 12월 31일 야간에 시작된 ‘중공군의 신정공세’에 평택 일대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이후 1월 25일부터 시작된 반격작전으로 2월 10일에 한강 이남을 확보했다. 이후 사단은 미 제9군단의 예비로서 서울 이남에서 대기하다 5월 16일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5월 공세’ 시에 동부전선에 대규모 돌파구가 형성되자, 5월 20일 저녁에 돌파구 첨단지역인 속사리로 투입되었다. 이곳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하고, 5월 21일부터 반격하여 풍암리를 거쳐 22일 저녁에 운두령을 확보했다.
이명수 이등중사가 소속된 미 제3사단은 5월 29일부로 운천으로 이동했고, 6월 3일부터 철원 방향으로 공격하여 고대산(464고지)를 탈취했다. 이후 휴전협상 진행으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으나, 치열한 고지쟁탈전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53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공산군이 휴전회담을 지연하며 군사력을 계속 강화해 나가자, 유엔군도 군사적으로 단호한 대응을 시도하고자 했다. 이에 사단은 공세작전을 위한 수색활동을 강화했다. 그가 소속된 중대는 3월 27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로 격멸했다. 이날 그는 미군 장병들과 함께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수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1판-7면-06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ㅅ-00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