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세(이명세)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736451
  • 전몰일자 : 19510819

공훈사항

이명세 일병은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1951년 4월 초순경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는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양양을 잇는 선)까지 진출해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제7사단은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의 신풍리 일대에서 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5월 16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고, 소양강 변의 신풍리 일대에 배치된 연대는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백병전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적을 저지하려 했으나,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려 5월 18일에는 풍암리까지 후퇴했다.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속사리-하진부리-대관령 일대에서 저지한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6월 7일부터 12일까지 양구 서북방의 군량현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신 캔자스선’ 상의 마석봉-504고지-757고지를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연대는 양구 서북방의 757고지, 917고지 일대에서 적과 고지를 뺏고 뺏기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중공군 5월 공세 이후 중공군과 유엔군은 피아간에 군사작전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7월 10일 최초로 양측 대표가 휴전협상 테이블에 앉았으나, 서로의 입장차를 좁히지 못해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무렵의 전투양상은 휴전협상에서의 설전과 더불어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한 진지전으로 진행되었다.
미 제8군은 전체 방어선 가운데 남으로 만곡부를 이루고 있는 양구 일대의 전선을 밀어 올리도록 미 제10군단에 임무를 부여했고, 이에 따라 양구 북방의 방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연대는 8월 9일 백석산 남쪽의 917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연대는 장마와 무더위 속에서 피아간에 뺏고 뺏기는 치열한 교전 끝에 9월 2일 목표를 확보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신병임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앞장서서 공격하다 8월 19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6판-6면 -07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8-ㅊ-03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