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석(李明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0143983
  • 전몰일자 : 19520716

공훈사항

이명석 일등중사는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2월 27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두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총공세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이명석 일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한 후 북한군과 벌어진 치열한 교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그는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이 일등중사와 연대병력은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으로 임진강과 화천저수지를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5월 7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어 설악산 부근의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명석 일등중사와 연대병력은 1951년 6월 3일부터 12일까지 향로봉지구 전투를 실시하여 940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어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미 제8군의 작전에 참가하여 서화리 동북방의 924고지를 점령한 연대는 10월 12일부터 15일까지 북한군 제19사단으로부터 월비산을 탈취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952년 초반까지 쌍방 간에 합의되었던 임시휴전선이 백지화됨에 따라 회담의 추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수도사단은 후방지역 공비들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후방치안의 확보가 점차 어려워지게 됨에 따라 이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1952년 2월부터 백아산, 모후산, 조계산 지구에 대한 소탕작전과 반복수색을 전개하였다. 이어 5월에는 금성-북한강 동안까지의 전선을 인수하여 동부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명석 일등중사와 장병들은 1952년 7월 8일 지형능선을 공격해 점령했으나 북한군의 역습을 받아 물러나고 말았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명석 일등중사는 1952년 7월 16일 반복수색을 벌이던 중 매복해 있던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석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0157 육)을 추서하고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06-ㄲ-01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