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석(李命石)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1504437
  • 전몰일자 : 19511120

공훈사항

이명석 일등중사는 1924년 11월 27일에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1월 2일에 부산에 주둔한 제5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그는 1948년 10월 28일에 경기도 시흥에서 제17연대가 창설될 때에 창설 요원으로 전속되었다. 제17연대는 1949년 6월 20일에 수도경비사에 배속되어 서울 용산으로 이동했고, 11월 15일에 옹진지구전투사에 배속되어 옹진반도로 이동하여 제2연대로부터 38도선 경비임무를 인수했다.
제17연대는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6월 26일 아침에 인천으로 철수했다. 이후 대전으로 이동하여 잠시 육본 경비임무를 수행하다가 지연전을 수행하고, 8월 7일에 낙동강방어선 상의 기계-안강지역에 투입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9월 14일에 부산으로 이동했고,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9월 18일에 인천으로 후속상륙하여 서울탈환작전을 실시했다.
이명석 일등중사는 11월 7일에 제2사단이 재창설될 때에 제31연대 창설 요원으로 차출되었다. 연대는 창설되자 바로 홍천으로 이동하여 잔적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제2사단은 국군과 유엔군 주력이 다시 38도선으로 후퇴할 때에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얼마 후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1951년 1월 7일에 충주로, 2월 13일에 안동으로 이동하여 후방지역작전을 실시했다.
제2사단은 4월 28일에 다시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전투지역인 청평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중공군의 제5월 공세’를 맞아 격퇴하고 즉각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6월 15일까지 적근산-육단리를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공산군은 휴전협상 시기를 이용하여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이에 유엔군은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공세적인 행동을 명령했다. 이에 사단은 10월 13일부터는 김화-금성 진격작전을 실시했고, 이명석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31연대는 사단의 예비연대로서 제17연대를 초월공격하여 18일에 최종 목표인 522고지를 탈취했다. 이후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가 계속 되었다. 이에 제2사단 장병들은 진지보강공사와 작전지역에 대한 수색정찰 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11월 20일에 방어진지 전방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석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3판-4면-1261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9-ㅌ-09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