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률(이명률)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28023
  • 전몰일자 : 19501231

공훈사항

이명률 일병은 1922년 5월 16일에 경상남도 부산시 영도구 달미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을 준비하던 1950년 9월 18일,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로 선발되어 미 제7사단 제32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명률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0월 중순, 미 제7사단은 부산에서 원산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사단 장병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후 10월 6일부터 철로와 차량을 이용하여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 부산했다. 그리고 10월 27일에 출항하여 원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국군 제3사단이 이미 10월 10일에 원산을 점령한 관계로 미 제7사단은 10월 29일에 함경남도 이원으로 행정적으로 상륙하여 11월 8일부터 풍산-갑산-혜산진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후 사단은 11월 21일에 혜산진을 점령했으나, 대규모 병력을 이룬 중공군에 의해 아군의 후방을 차단했기 때문에 11월 27일부터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명률 일병이 소속된 미 제32연대는 철수 도중에 장진호 동쪽의 중공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받고 하갈우리로 집결하여 미 제1해병사단에 합류했다. 당시 미 해병 제1사단은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된 하갈우리로 철수하고 있었다. 미 제32연대는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 12월 6일에 하갈우리에서 함흥 방향으로 돌파작전을 실시했다. 이들 부대는 부성리(일명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여 12월 8일에 고토리에 도착했고, 그리고 황초령을 12월 10일에 진흥리에서 엄호부대와 연결했고, 12월 11일에 함흥지역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이후 미 제7사단은 미 제3사단과 함께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를 엄호한 후에 12월 21일에 흥남항에서 출발하여 22일에 부산항을 통해 대구로 진출하여 부대정비를 실시했다. 당시 대구 북방지역에서는 미처 도망가지 못한 북한군 잔적들이 게릴라로 변모하여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다. 이병철 일병이 소속된 중대는 12월 31일에 북한군 게릴라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로 격멸했다. 이날 그는 미군 장병들과 함께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률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82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7-ㄹ-09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