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남(李明南)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204

공훈사항

이명남 경사는 1925년 5월 7일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경기도경 개성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의성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경사는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개성 각 지서병력은 영정지서로 집결한 뒤 100여 명은 김포에 상륙하여 경기도 비상경비사령부 명령에 따라 6월 25일 밤 9시에 파주서로 이동했다. 개성 각 지서병력은 6월 26일 새벽 3시에 임진강 방어에 투입되었다가 6월 27일 오전 7시에 인천으로 다시 철수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이 남진함에 따라 아군 군경부대도 지연전을 펼치며 후방으로 퇴각했다.
개성경찰은 8월 4일 창녕에 도달하여 고령지구사령부 통제하에 주보급로 경비, 거점방위 및 주요시설 경비, 피난민 구호·통제, 오열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의 퇴각과 함께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전개되었다. 개성경찰은 10월 10일 개성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잔적소탕작전과 치안유지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부터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아군 군경부대는 또다시 후퇴를 해야 했다.
군위까지 후퇴했던 개성경찰은 1951년 1월 25일 국군과 유엔의 재반격작전 개시에 따라 군부대의 기동에 보조를 맞춰 북으로 전진했다. 개성경찰은 북쪽 방향으로 기동하면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2월 4일, 북으로 기동 중 잔적이 발견되어 교전이 벌어졌다. 이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적을 격멸하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남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유해(50판-4면-15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5-ㅁ-005)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