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낙(李明洛)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8716
  • 전몰일자 : 19510314

공훈사항

이명낙 일병은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격퇴하던 1950년 9월 초순 제1사단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소총병으로서 제1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명낙 일병이 배치된 낙동강 방어선에선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 주력은 후방이 차단되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9월 28일 서울탈환에 기여하고,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하였다. 10월 19일에는 평양에 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어 청천강 남쪽의 신안주 부근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연대병력은 11월 20일 태천-구성-삭주-신의주로 진출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27일을 전후하여 연대가 방어 중인 대령강 동쪽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선 이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태천 동남쪽의 학봉동, 기우산, 토라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격전을 펼쳤으나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 공격을 기도하는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명낙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박천 북쪽의 충막동-봉지리 선으로 철수하여 저지 진지를 구축하여 측 후방 돌파를 기도하던 중공군을 격퇴한 후 용산동 일대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중공군의 공세가 두 차례나 계속되면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37도선 평택까지 철수하였다.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신정 공세 이후 계속된 철수작전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지연전을 펼치며 고갈된 피해를 회복하고 부대정비를 거쳐 2월에 총공세로 전환하였다. 그와 연대 장병들은 한강 남쪽으로 진출한 이후 한 달여 동안 서울을 목전에 두고 한강철교-영등포에 이르는 여의도에 배치되어 경계와 잔적소탕 작전을 병행하고 있었다.
이명낙 일병은 일부 병력과 정찰 도중 북한군과 조우하여 소총 사격을 가하며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던 중 1951년 3월 14일 서울탈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낙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13-ㅍ-03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