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낙(李命洛)

  • 군별 : 육군
  • 계급 : 상병
  • 군번 : K1124352
  • 전몰일자 : 19510515

공훈사항

이명낙 상병은 1922년 3월 5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저지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상병은 1950년 9월 초순, 부산에 있는 육군 제2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 후에 육군본부로 배치되었다. 이후 그는 카투사(KATUSA) 병으로 차출되어 미 제8군으로 배치되었다가 미 제24사단으로 전속되었다.
이 상병이 부대로 배치되고 얼마 후인 10월 24일 미 제24사단은 청천강을 도하하여 1차 총반격작전(일명 ‘추수감사절 공세’)을 개시했으나, 대규모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밀려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사단은 11월 24일 개시한 유엔군의 2차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의 일환으로 공격작전을 전개하여 선천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인접 국군부대가 붕괴함으로써 후방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다시 청천강 선으로 철수했다. 이후 12월 6일에 평양마저 포기하고 철수하여 13일에는 38도선 상의 김화-포천-의정부 축선에 배치되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주공을 서울로 향해 총공세(일명 신정공세)를 개시했다. 유엔군은 적에게 최대한 살상을 가하면서 평택-삼척 선까지 철수토록 명령했다. 이 상병은 미군 장병들과 함께 중공군의 공격을 맞아 조직적으로 철수하며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입히며, 1951년 1월 4일 의정부-서울을 거쳐 장호원 일대로 철수했다. 그리고 2월 초에 양평 서측의 양자산(704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 상병이 소속된 미 제24사단은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맞아 현 방어진지를 지키며 적을 격퇴했다. 유엔군이 중동부 전선에서 2월 21일 반격(일명 Killer 작전)을 실시할 때 사단은 미 제9군단의 예비로서 차후 작전을 준비하였다. 이후 3월 7일부터 시작된 반격작전(일명 Ripper 작전)에 참가하여 31일에 가평을 탈환했다. 사단은 계속된 반격작전(일명 Rugged 작전, Dauntless 작전)에 참가하여 4월 9일에 화천-광덕산을 연하는 선(일명 캔자스선)에 도달하였고, 계속 공격하여 화악산을 탈취하고 사창리까지 진출했다. 사단은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에 맞서 강력히 저항했다. 이날 전투에서 이 상병은 용감하게 앞장서서 싸우다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5월 15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낙 상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3판-14면-8680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ㅋ-11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