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기(李明基)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상사
  • 군번 : 2800389
  • 전몰일자 : 19530625

공훈사항

이명기 이등상사는 경기도 수원시 향남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1949년 1월 3일에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제17연대에 입대하였다. 이후 연대는 서울 용산으로 이동했다가 11월 15일에 옹진반도로 이동하여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했다.
제17연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고 다음 날 아침에 인천으로 철수했다. 이후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보은-상주 일대에서 지연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8월부터 9월 중순까지 기계-안강 지역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연대는 인천상륙작전부대로 선발되었으며,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9월 18일에 인천으로 후속 상륙한 후에 영등포 남쪽으로 기동하여 서울의 동쪽 지역을 탈취했다. 이후 유엔군의 주력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작전을 감행할 때, 연대는 서울에 남아 주요시설에 대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이명기 이등상사가 소속된 제17연대는 11월 7일에 국군 제2사단이 재창설될 때에 그 예하 부대로 편성되었다. 제2사단은 포천-평강 일대에서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던 북한군 잔적소탕을 위해 투입되었다. 이후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38도선으로 철수할 때,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리고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방어진지에서 철수, 안동으로 이동하여 후방지역작전을 했다. 사단은 1951년 4월 28일에 청평으로 이동하여 다시 전방작전에 투입되었고,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적근산-육단리까지 진격했다. 이후 전선은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사단은 10월 13일부터 21일까지 금성-금화 진격전으로 금성 서남쪽 직목동까지 진출했다.
제2사단은 몇 번의 부대교대를 거쳐 1952년 6월 30일부로 김화 동쪽의 남대천 일대의 방어진지를 미 제40사단으로부터 인수했다. 이곳에서 제17연대는 10월 14일에 사단의 선두부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저격능선을 탈취한 후 11월 24일까지 뺏고 빼앗기는 수차례의 공방전 끝에 저격능선을 탈취했다. 그리고 12월 30일부로 고대산 전방의 독서당리에 배치되어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395고지)와 화살머리고지(281고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후 1953년이 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6월 중순이 되자 공산군은 주요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했다. 이명기 이등상사는 6월 25일 야간에 방어진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격퇴했으나,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기 이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2판-7면-08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1-ㅈ-07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