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근(李明根)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730

공훈사항

이명근 경사는 1924년 8월 2일 충북 옥천군 군북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충북도경 보은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김천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경사는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북한 유격대가 태백산 일대에 계속 침입했다. 6월 10일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38도선 접경지역인 경기·강원 2개 도에 비상경비태세 강화명령(갑호비상근무령)을 내려 북한군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 경사는 비상대응체제와 인접 경찰지서 간 통신망 유지 상태를 점검하고 읍면단위로 대응요령을 전파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보은경찰은 지역 내 주요시설 경비, 보은-청주, 보은-대전, 보은-상주를 잇는 주요 도로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7월 3일 이 경사는 보은 교암리에서 청주 방면의 도로를 경비하던 중 북한군 정찰부대로 추정되는 1개 소대규모의 적과 조우하여 이 경사의 경비 팀과 적 부대 간 교전이 벌어졌다. 약 1시간가량의 전투 끝에 이 경사의 팀은 적 3명을 사살하였으며, 이 경사의 경비 팀원도 2명이 전사했다.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바탕으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7월 6일 충주가 함락되자 보은경찰은 아군 군부대와 병행하여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며 후방으로 후퇴했다. 보은경찰은 영동을 거쳐 7월 27일 김천에 도달하였고, 군부대가 배치되지 않은 지역에 투입되어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7월 30일 김천에 도달한 북한군과 방어준비를 하고 있던 아군 간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이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적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고 계속해서 전투 중 적의 집중사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근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5-ㅎ-029)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