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권(이명권)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2704588
  • 전몰일자 : 19510211

공훈사항

이명권 이등중사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선으로 철수를 거듭하고 있을 시기인 1950년 7월 22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5연대에 배치되었다(출생 일자 및 출생지 미상).
이명권 이등중사는 다부동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이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8월 12일부터 다부동-군위 일대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 제3사단 일부 병력이 약목 일대에서 도하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으며,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미쳐 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연대는 방어선 중앙이 돌파되고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명권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10월 9일에 고랑포를 출발하여 접적 없이 동북쪽으로 진격, 38도선 북쪽에 위치한 마전리를 점령한 후 19일에는 평양에 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10월 23일 안주 일대에서 청천강을 도하한 후 24일 오전 10시 30분 전차 1개 소대가 용산동 후방으로부터 돌입하면서 북한군 전차를 격파하자, 남·북에서 협공을 받은 북한군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운산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간목표인 영변과 용산동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12월 31일 임진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한 중공군은 후속 부대를 도하시켜 연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였고, 또 일부 중공군은 적성 남쪽 진지로 접근하며 추격해왔다. 이로 인해 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사격도 하지 못한 채 방어진지 돌파당하였고, 중공군이 내륙 깊숙이 침투함으로써 사단의 우전방 지역에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이명권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1951년 1월 1일 두포리-금곡리-무건리 선에 배치되어 중공군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그가 소속된 사단은 1월 4일 서울에서 37도선 평택까지 철수한 후 수원, 의왕 거쳐 한강 서울 재탈환작전에 참전하였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명권 이등중사는 1951년 2월 11일 영등포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권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3판-7면-3559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10-ㅊ-08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