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구(이명구)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16889
  • 전몰일자 : 19500828

공훈사항

이명구 중위는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호국간성이 되고자 1949년 7월 15일 육군사관학교 생도 1기(육사 제10기)로 입교했다. 그가 1년 동안의 군사훈련 과정을 수료한 후 임관을 앞두고 있을 때인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 명에 의거 육사 1기생 전원과 2기생 중 277명 등 539명은 생도대대에 편성되어 6월 25일 오전 8시경 포천의 내촌에 도착, 47번 국도 인근 고지에 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26일 오후 적의 공격을 받고 근접전투를 치르는 등 3시간을 버티다 육본 명령에 따라 태릉으로 철수했다. 그 사이 의정부가 적 수중에 들어가면서 생도대대는 27일 서울 동북쪽 불암산과 육사를 잇는 방어선에 다시 투입됐다. 그러나 그날 밤 적의 포격에 이어 28일 새벽 적군이 밀려들자 버티지 못하고 한강 이남으로 다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 중위는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7월 10일 대전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고, 8월 중순경 회복되어 육군제병학교(보병학교) 교관으로 배치되었다.
이 중위가 육군제병학교에 배치될 당시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의 8월 공세를 맞아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제병학교는 장교 교육에 여념이 없었다. 육군제병학교가 위치한 경남 동래는 각종 지원부대와 시설 등이 밀집되어 있고,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미군의 지원물자가 경부선이 지나는 동래 인근을 거쳐 전방지역으로 추진되고 있었기에 적 게릴라들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특히 장교 교육을 하는 제병학교는 미래 전력의 원천이었기에 적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전선 상황이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제병학교는 교관·조교를 비롯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게릴라들의 공격에 대응해 왔다. 이 중위는 장교 교육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서도 기동타격대로서 이들 게릴라 소탕작전에 앞장서 왔다. 8월 28일 적 게릴라들이 학교를 급습했고, 이 중위와 기동타격대원들은 이들을 맞아 전투에 돌입했다. 이 전투에서 이 중위는 대원들을 이끌고 용감하게 앞장서서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구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8판-4면-07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3-ㄴ-02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