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구(이명구)

  • 군별 : 육군
  • 계급 : 소령
  • 군번 : 11498
  • 전몰일자 : 19500704

공훈사항

이명구 소령은 1924년 4월 5일 출생했다(출생지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과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육군사관학교에 군의 제4기로 입교하여 군사교육훈련을 받고 1948년 10월 13일 임관했다. 이 소령은 제3여단 제5연대에 군의관으로 배치되었다. 1949년 7월 10일 제5연대는 제2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에 위치하고 있던 제2사단은 휴가나 외출·외박 중인 병력을 긴급 소집하여 부대가 편성되는 대로 포천 축선에 투입되었다. 이 소령과 제5연대(-) 장병들은 의정부 북방의 축석령으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제5연대는 전투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중화기 실탄이나 수류탄은 한 발도 없었고, 소총탄도 M1 소총 8~16발, 카빈 소총 15~30발을 휴대했을 뿐이었다. 축석령 지역으로 투입된 북한군은 전날 송우리에서 국군 제3연대(-)를 격파한 제3사단과 제107전차연대였다.
제5연대는 6월 26일 3시에 사단지휘소가 설치된 금오리를 출발하여 이동하던 중 본자일 일대에서 적 전차와 조우했다. 연대는 인근의 208고지를 점령, 급편방어로 전환하여 적 전차의 공격에 겨우 소총으로 응수하면서 30분간 교전하였으나 돌파당하고 말았다. 제2사단에 배속된 포병학교 제2포병대대의 직사포 공격으로 적 전차부대가 잠시 물러난 사이 제5연대는 병력을 수습하여 다시 축석령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곧 적의 강력한 보전협동 공격에 직면했고,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절대적인 전투력의 열세로 의정부 남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연대는 27일 창동 방어선에 투입되어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 수도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혈투를 벌였으나, 적 전차를 막을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전차에 의해 또다시 돌파당할 수밖에 없었다. 연대 장병들은 분산 철수하여 28일 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넜다.
연대는 29일 밤 수원에서 긴급 재편성을 한 후,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의 혼성 제2사단에 편성되어 30일 오후 4시에 말죽거리 동쪽의 95고지 부근에 배치되었다. 제5연대는 30일 북한군 제3사단 제8연대의 남진을 지연했고, 7월 1일 과천 일대로 철수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이 소령은 잠시도 쉴 틈 없이 밀려드는 부상자를 치료해 왔고, 한강방어선전투에서도 부상자를 현장에서 치료하다 적의 포격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7월 4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구 소령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5651 국)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47판-1면-16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7-ㅌ-01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