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관(李明官)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321002
  • 전몰일자 : 19501015

공훈사항

이명관 이등중사는 경상남도 거제군(現 거제시) 사등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전 38도선 일대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잦았던 1950년 5월 중순경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3사단 제23연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23연대는 1950년 6월 29일 울진지역에 투입되었다. 이후 연대는 동해안 축선의 영해, 영덕, 장사동, 포항, 형산강 변 일대에서 9월 14일까지 북한군 제5사단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연일을 탈환한 후 총반격 태세에 들어갔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16일 총반격으로 전환했고, 제3사단은 9월 17일 형산강을 도하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연대는 일일 평균 17.3km의 속도로 진격하여 9월 30일 강릉을 탈환했다. 연대는 10월 1일 양양군 인구리 북쪽에서 38도선을 넘어 북진함으로써 최초의 38도선 돌파부대가 되었다. 이명관 이등중사와 부대원들은 사기충천하여 동해가도를 따라 양양, 거진, 장전, 통천을 점령하며 진격했고, 10월 10일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물리치고 원산 시가지를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이명관 이등중사는 부상을 입고 수도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명관 이등중사는 1개월여의 치료 끝에 회복되어 제3경비대대 창설요원으로 전속되었다. 육군본부는 후방지역에서의 공비토벌과 보급로 확보, 포로경비 등을 위해 1950년 11월부터 1951년 4월까지 14개 경비대대를 창설했다. 제3경비대대는 1950년 11월 24일 경북 의성 일대의 공비토벌작전을 하던 제6유격대를 개편하여 창설되었다.
한편,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당한 북한군 패잔병들은 후방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던 지방 게릴라들과 합세하여 점차 전력을 재정비하고,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거나 전투근무지원 시설들을 습격했다. 이들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38도선으로 내려오자 전선타격부대와 배합전술을 펼치면서 유엔군의 후방을 더욱 적극적으로 교란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정규 사단들을 투입하여 게릴라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1950년 10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제3경비대대는 제11사단에 배속되어 호남지구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이 토벌작전에서 제3경비대대는 주보급로 및 주요시설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이명관 이등중사는 1951년 5월 중순경 소대원을 통제하며 적을 탐색하던 중 은거해 있던 게릴라의 기습사격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관 이등중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07판-7면-01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3-ㄹ-056)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