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건(李明建)

  • 군별 : 공군
  • 계급 : 소위
  • 군번 : 50130
  • 전몰일자 : 19500821

공훈사항

이명건 소위는 1925년 10월 30일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교남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을 맞이했으나 정부수립 준비로 혼란스러웠던 1948년 8월 2일, 경기도 수색의 항공기지사령부로 입대하여 소정의 항공분야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항공부대는 1948년 5월 5일 경기도 고양군 수색에 위치한 조선경비대 제1여단사령부 내에 통위부 직할부대로 창설되었다. 그해 9월 1일에 항공부대가 김포비행장으로 이동하면서 김포기지는 한국 공군의 발상지가 되었다. 항공부대는 9월 8일 미군으로부터 L-4연락기 10대를 인수받아, 9월 15일에 역사상 최초로 서울 광화문 상공에서 우리 손으로 조립된 태극표지를 단 L-4 연락기 10대의 전시 비행을 실시하였다. 이날 육군 보병부대가 중앙청을 향해 도보행진을 하는 가운데 L-4연락기가 육군의 도보부대 머리 위에서 비행을 했던 것이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전면적인 남침을 했을 때, 이명건 소위는 여의도 항공기지에 근무했다. 당시 북한 공군의 전력은 YAK-9, IL-10기를 포함한 전투기만 226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한국 공군은 연락기 및 훈련기로 L-4/5기 12대와 T-6기 10대 등 총 22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국 공군은 당시 가용한 모든 항공기를 동원해 북한군의 남진을 최대한 저지하고자 했다. 6월 26일부터 T-6건국기는 8개의 폭탄을 장착하고, L-4/5기도 후방석의 관측사가 2개의 폭탄을 가슴에 안고 출격하여 저공비행으로 산간 계곡을 비행하며 북한군을 공격했다. 그마저 6월 27일에 보유한 폭탄을 모두 사용함으로써 정찰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6월 27일부터 미 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여 제공권을 장악하자 한국 공군은 보조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다.
이명건 소위는 주로 L-4/5기를 조정하여 육군본부와 군단 또는 사단에 주요한 작전명령서를 전달하는 연락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낙동강방어선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던 8월 21일에 저공비행으로 연락 임무를 수행하다가 적의 대공포화에 맞아 항공기가 추락했을 때 애기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건 소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8-5면-00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ㄴ-04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