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면주(李冕柱)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11231

공훈사항

이면주 경사는 1918년 12월 30일 경남 의령군 용덕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1년 2월 8일 경찰에 입문했으며, 전몰 당시 경남도경 거창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거창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주공부대는 7월 3일 한강을 도하여 경부가도를 따라 남진했다. 이 무렵 경남 서부지역과 호남지역에는 2-10명의 소규모 공비들이 출몰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와 횟수가 증가했다.
거창경찰은 하동서 병력과 함께 하동 탈환작전(1950.7.27)을 실시했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이후 거창경찰은 밀양에 투입(1950.8.14)되어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했다. 이어서 거창경찰은 8월 하순 진동리를 방어하던 군경부대가 적의 공세에 밀려 진동리로부터 철수하자 진동리에 투입되어 전남·전북 경찰부대와 함께 진동리지구 방어작전을 수행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전개되었다. 거창경찰은 10월 14일 거창경찰서를 수복하고 피난민 구호와 통제활동, 철도·교량 경비, 오열색출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의 공비섬멸 작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 지침에 따라 거창경찰은 이 기간에 공비섬멸작전을 수행했다.
거창경찰은 함양에 공비들이 준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함양에는 미처 퇴각하지 못한 1,000여 명의 공비들이 남아서 지역 일대의 양민들을 학살하거나 식량과 가축을 약탈했다. 거창경찰은 공비소탕작전(11.10-11.20)을 실시하여 40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거창경찰은 이 작전이 끝난 후 거창으로 복귀하여 철도·교량 경비, 공비토벌 작전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951년 12월 31일 야간에 거창경찰서가 수 명의 공비들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적을 격퇴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공비가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면주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6-ㅇ-07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