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면용(李免鎔)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9138
  • 전몰일자 : 19501215

공훈사항

이면용 일병은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8월 초순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면용 일병은 가산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9월 15일 기관총과 박격포, 수류탄 등으로 완강히 저항하는 북한군과 수차례 치열한 접전을 수행하며 가산성 가장자리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북한군 제13, 제1사단의 패잔병들은 다부동, 가산성 북쪽으로 철수하고 있었으며 결국 대구 점령을 위한 북한군 제2군단의 9월 공세는 좌절되었다. 이후 9월 25일 낙동리에서 도하를 완료하고 연대병력은 선산-상주-보은을 거쳐 미원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소백산맥의 험한 준령을 따라 북으로 도주를 시도하던 패잔병을 추격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소탕하였다.
이 일병과 연대병력은 9월 28일 서울 수복작전에 기여하고 9월 말 38도선에 도달하였다. 10월 9일에는 38도선을 돌파해 19일 평양에 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면용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10월 23~24일 안주 일대에서 청천강을 도하한 후 25일 운산에 도착하였다.
청천강 남쪽의 신안주 부근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이 일병과 연대병력은 11월 24일 북한군 병참선의 요충인 태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연대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교량을 파괴시켰고, 또 도로상에는 도처에 120mm 박격포탄으로 만든 부비트렙을 매설하였다. 사단 공병이 이를 제거하는데 다소 시간이 지연되었으나 북한군의 저항이 경미하여 저녁 무렵에는 태천을 남쪽과 동쪽에서 포위하게 되었다.
이면용 일병과 장병들은 12월 7일 사리원에서 남천으로 이동하여 구월산 일대에서 패잔병을 소탕하였다. 이후 위천리, 구화리 일대의 축차적인 지연 진지를 점령하여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지역내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시하고 철수가 완료되자 14일에는 고량포-적성 일대에 배치되어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이면용 일병은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며 언제나 선두에 서서 용맹을 발휘하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 일병은 1950년 12월 15일 고랑포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면용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12-ㄷ-07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