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희(李萬熙)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5417
  • 전몰일자 : 19510117

공훈사항

이만희 중위는 1928년 3월 27일에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 및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던 1950년 9월 18일에 부산 동래에 위치한 육군종합학교 제3기로 입교하여 6주간 소정의 군사교육훈련과정을 수료하고, 10월 27일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제2사단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이만희 중위가 부대로 전입했을 때, 제2사단은 지휘소를 서울에서 가평으로 이동하여 예하 부대는 철원, 의정부, 구화리, 홍천 일대에서 후방교란 활동을 하고 있던 북한군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이후 사단은 북한군 패잔병 소탕작전을 멈추고 포천 북방의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추후 예상되는 중공군 공격에 대비했다. 그가 소속된 수색대는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사단 장병들은 임박한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진지구축과 철조망 설치 등 방어준비 강화에 여념이 없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드디어 총공세(일명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시작하여 서울을 압박했다. 사단 장병들은 방어진지를 사수하며 적의 공세를 저지하고자 했으나, 이미 적은 아군의 후방을 차단하며 포위 섬멸을 기도했다.
사단 장병들은 중공군의 공격을 하룻밤을 버티지 못하고 다음날인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진지에서 이탈하여 청평으로 철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적들이 후방을 차단한 상태여서 전투를 실시하며 차단선을 돌파해야 했다. 이만희 중위가 지휘하는 수색대는 장병들과 함께 1월 3일에 청평에 도착하여 여주로 이동했다. 그리고 7일에는 충주에 집결한 후 미 제10군단의 예비로 풍기에서 재정비하며 충주-단양 간 병참선을 경계했다. 그가 지휘하는 수색소대는 1월 17일에 병참선 경계를 하던 중 적 1개 소대 규모로부터 습격을 받았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희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7판-6면–231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8-ㄱ-07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