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희(李万熙)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4391
  • 전몰일자 : 19510104

공훈사항

이만희 일병은 충청북도 충주군 연수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0년 8월 하순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5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5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의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제7사단은 영천전투에서 적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사단은 영천에서 북한군 제15·8사단의 마지막 공세를 물리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을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이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9월 29일 제2군단에 배속되었고,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수안보-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서울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연대는 연천, 평강을 거쳐 10월 17일 곡산에 도달했고, 20일 평양이 탈환되자 23일부터 29일까지 평양과 그 북방 일대의 잔적소탕 임무를 수행했다.
10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된 사단은 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로 집결했다. 사단은 11월 2일 개천 동쪽의 비호산 일대에 배치되었고, 연대는 그 우측의 760고지 일대에 진지를 편성했다. 사단은 11월 3일부터 7일까지 개천 동쪽의 비호산 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단과 혈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함으로써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하는 부대가 되었다. 이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사단은 11월 22일 묘향산으로 공격을 개시했으나, 중공군 제38, 42군단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사단은 미 제8군 철수계획에 따라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춘천 동북방의 38도선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상급부대 계획에 따라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선두에서 용감히 싸우다 적탄에 맞아 1951년 1월 4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희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09판-2면-27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1-ㄲ-03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