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하(李滿夏)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사
  • 군번 : 2901836
  • 전몰일자 : 19501110

공훈사항

이만하 중사는 충청남도 청양군 사량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과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3월 5일 제2여단 제18연대에 입대했다. 제18연대는 동년 8월 10일부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이 중사는 1949년 9월부터 1950년 1월까지 옹진지구전투사령부에 파견되어 은파산 일대에서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18연대(-)는 제7사단에 배속되어 의정부 북방 덕정 일대에서 북한군 제4사단과 일전을 벌였다. 그리고 6월 29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강방어선의 김포지구전투사령부에 소속되어 김포비행장-오류동-영등포-안양 일대에서 혈전을 벌이면서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을 지연시켰다.
7월 5일 제18연대는 제1, 제8연대와 함께 수도사단(수도경비사령부 개칭) 예하부대로 재편되었다. 이후 연대는 진천-청주 북방의 미호천-남일면 성무봉 일대에서 적의 남진을 지연시켰다. 연대는 8월 3일부터 낙동강방어선에 투입되어 길안-청송 방어선과 의성 북방의 장림리 전투, 영일군 기계전투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혈전을 거듭한 끝에 적을 격퇴함으로써 기계-안강-경주 축선의 돌파 위기를 해소할 수 있었다.
9월 15일 실시된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16일 반격으로 전환했고, 연대는 18일에 안강을, 21일에는 기계를 각각 탈환했다. 국군은 공격한계점에 이른 적이 퇴각하자 9월 22일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 중사와 연대 장병들은 23일 운주산에서부터 적을 추격하여 청송-춘양-영월-평창-38도선 직후방의 서림리(30일)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한 연대는 10월 4일 간성을 점령한 후, 강원도 원통-양구-회양-신고산-안변 방향으로 우회하여 진격했다. 연대는 원산(10일), 함흥(17일)을 점령하고 28일까지 개마고원 일대에 다다랐다.
11월 4일 함경북도 황수원강의 수상리와 백산 일대에서 미 제7사단과 임무를 교대한 연대는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기 위해 청진 남서쪽의 명천에 집결했다. 이때 적은 제507여단의 패잔병들과 증원된 해안경비부대 등을 동원하여 청진 남방의 어랑천에 경고한 진지를 구축했다. 연대는 명간천, 어랑천 일대에서 11월 8일부터 21일까지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격전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이 중사는 소대원을 이끌고 앞장서서 돌격하던 중에 11월 10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하 중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4771 국)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33판-2면-07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5-ㄲ-08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