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종(李万鍾)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5222
  • 전몰일자 : 19500717

공훈사항

이만종 일병은 경상북도 금릉군 농소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12월 말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 과정을 마친 후 춘천으로 이동해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6·25전쟁 직전인 6월 20일에는 수도경비사령부에 배속되어 서빙고로 이동하였다. 그 후 이만종 일병은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당시 38도선 일대에서는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후방지역에서도 침투한 북한의 무장공비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연결된 소요사태가 곳곳에서 발생해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만종 일병을 비롯해 다른 장병들은 휴가는커녕 외출·외박조차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던 1950년 6월 24일 토요일을 기해 그동안 계속되어오던 비상 경계령이 해제되었다. 많은 장병들이 농번기를 위해 휴가를 떠났고, 영내에 남아 있는 병력들도 외출·외박을 나갔다. 이 일병이 일요일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무기인 2.36인치 로켓포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관통할 수 없었다. 개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38도선의 대부분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만종 일병이 소속된 사단은 의정부 지구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북한군의 전차를 격파할 수 없었다. 북한군은 6월 27일 저녁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하고, 6월 28일 새벽 서울에 진입하였다. 이 일병은 소부대 단위로 분산된 채 삼송리를 거쳐 행주로 철수해 한강을 도하하였다. 이 일병과 장병들은 오류동 일대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후 7월 3일 한강방어선이 무너지자 지연전 및 재편성을 병행하며 지연전을 전개하였다. 그는 사단 장병들과 함께 7월 6일 진천지구 전투, 7월 13일 청주 전방 미호천 전투, 14~16일 청주 남쪽 고은리 전투를 수행하고, 7월 17일 보은 전투를 수행하면서 적을 저지하였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이만종 일병은 수류탄과 총검으로 격렬하게 싸웠고 당황하여 흩어지는 적을 향해 소총 사격을 가하며 분전하였으나 1950년 7월 17일 보은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종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40면-21802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2-ㅊ-04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