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조(李万祚)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230231
  • 전몰일자 : 19510909

공훈사항

이만조 이등중사는 경상북도 영양군 도산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 이등중사는 1950년 12월 29일 부산에 있는 제2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5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이등중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 제3차 공세에 밀려 37도선 일대로 후퇴하고 있었고, 제7사단은 횡성 북방에서 적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연대는 1951년 1월 14일부터 24일까지 북한군 제2군단과 치열한 교전 끝에 영월을 탈환했다. 2월 11일 개시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 연대는 16일부터 18일까지 평창, 영월 일대에서 북한군 제2군단과 공방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과 리퍼작전(3. 7.~3. 31.) 때 연대는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3월 하순에는 인제군 현리 일대까지 진격하여 적과 대치했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고, 연대는 공격을 전개하여 4월 22일 인제군 원통 일대까지 진출했다. 이때 중공군은 제5차 공세(4월 공세)를 시작했고, 제5연대는 4월 23일 제5사단에 배속되어 방어로 전환했다. 연대는 북한군 제6사단은 격전을 벌이면서 분전했지만, 전투력의 열세에 밀려 인제 서남방의 부평리, 소재 일대까지 후퇴했다. 중공군 5월 공세 때 양구 서남방 소양강 변의 구만리에 배치된 연대는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백병전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적을 저지했으나, 압도적인 공격에 밀려 풍암리까지 후퇴했다.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한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6월 7일부터 12일까지 양구 서북방의 군량현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신 캔자스선’ 상의 마석봉-504고지-757고지를 잇는 선을 확보하게 되었다.
연대는 8월 9일 백석산 남쪽의 917고지 일대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장마와 무더위 속에서 피아간에 뺏고 뺏기는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을 물리치고 9월 2일 이를 확보했다. 이후에도 연대는 이 일대에서 격렬한 고지쟁탈전을 이어갔다. 이 전투에서 이 이등중사는 소대원을 이끌고 진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9월 9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조 이등중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려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34249 육)을 추서하고, 유해(11묘역-4판-19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3-ㅁ-04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