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조(李萬祚)

  • 군별 : 육군
  • 계급 : 병장
  • 군번 : 0221231
  • 전몰일자 : 19510725

공훈사항

이만조 병장은 1928년 6월 3일 경상남도 통영군 도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병장은 1950년 11월 초순 부산에 있는 제2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5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병장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청천강 일대에서 중공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제7사단은 11월 초 개천 동쪽의 비호산 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단과 혈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한 후, 덕천으로 이동하여 차후 작전을 준비 중인 상황이었다. 연대는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이 강력한 반격에 밀려 11월 27일 철수를 개시하여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춘천의 38도선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 제3차 공세와 1951년 2월의 중공군 제4차 공세 때 연대는 중동부 축선의 하진부리-평창-영월 선을 오르내리며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과 리퍼작전(3. 7.~3. 31.) 때 연대는 평창과 인제 일대에서 공산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4월 22일 중공군은 제5차 공세(4월 공세)를 시작했고, 제5연대는 제5사단에 배속되어 북한군 제6사단과 격전을 벌였지만, 전투력의 열세로 인제 서남방의 부평리, 소재 일대까지 후퇴했다. 5월 16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고, 소양강 변의 부평리, 구만리에 배치된 연대는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연대는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려 5월 18일에는 풍암리까지 후퇴했다.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한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6월 7일부터 12일까지 양구 서북방의 군량현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신 캔자스선’ 상의 마석봉-504고지-757고지를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연대는 양구 일대에서 고지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이 병장은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7월 25일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조 병장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려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34249 육)을 추서하고, 유해(11묘역-4판-19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3-ㅁ-01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