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이(李萬伊)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63174
  • 전몰일자 : 19500904

공훈사항

이만이 일병은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중순, 경북 대구에 설치된 대구방위사령부로 현지에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경비대대(5202부대)에 배치되었다.
북한군의 기습적인 전면 남침으로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대구로 이동함에 따라 임시수도인 대구 방위가 급선무가 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7월 24일 제2사단을 해체하면서 육본 직할로 대구방위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대구방위사령부는 기구만 설치되었지 실질적인 병력이 없었기에 대구방어를 위해서는 각 도에서 집결한 경찰병력, 청년방위대, 후방병력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동 사령부는 8월 1일 대구방어 및 팔공산 지역에 대한 경비를 위해 대구 동촌비행장에서 경비대대를 창설했다. 병력은 대구 시내에서 모집한 신병들로 편성했고, 대원들은 일제 99식 소총으로 무장하여 전투 능력은 미흡했으나, 정신력만은 조국을 지켜내겠다는 투지로 가득 했다.
이만이 일병이 부대로 입대했을 당시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맞이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8월 중순 전선이 왜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을 잇는 대구 북방에 형성되고, 9월 2일 북한군 9월 공세가 시작됨으로써 대구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및 파괴 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대구 시내에는 각급 부대들과 정부 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어 북한군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대구 북방까지 진출했던 북한군은 9월 16일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철수했고, 미처 후퇴하지 못한 패잔병들은 팔공산 등지로 숨어들어 유격활동을 전개했다.
이만이 일병이 소속된 경비대대는 9월 4일에 팔공산 일대에 적 게릴라가 출몰했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즉각 출동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다가 적의 기습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이 일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7면-09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1-ㄷ-09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