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율(李萬律)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78378
  • 전몰일자 : 19510529

공훈사항

이만율 일병은 경상북도 영일군(現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북진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38도선으로 후퇴할 당시, 1950년 11월 하순경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5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7사단 제5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만율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방어 편성에 전념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7사단은 춘천 일대의 38도선 상에 배치되어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다.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중공군은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시작했고, 제5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연대는 주방어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상급부대 계획에 따라 강원도 홍천 일대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적의 압박 가중됨에 따라 연대는 또다시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쪽의 석항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북한군 제2군단 병력이 영월로 진출함에 따라 연대는 1월 14일 대야리로 이동하여 1월 24일까지 치열한 교전 끝에 영월을 탈환했다. 2월 11일 개시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 연대는 2월 16일 북한군 제2군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평창 일대에서 후방으로 후퇴했다. 적은 계속해서 영월을 점령하려고 기도했으나, 연대는 2월 17~18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과 리퍼작전(3. 7.~3. 31.) 때 연대는 평창과 인제 일대에서 공산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3월 중순경에는 평창군 하진부리를 점령하여 경강국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고, 연대는 공격을 전개하여 4월 22일 인제군 원통 일대까지 진출했다. 이만율 일병은 4월 중순경 평창군 속사리 일대에서 홍천으로 공격하다가 중공군과 교전 중 적의 기습사격에 중상을 입고 서울에 위치한 제36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건강이 회복되어 5월 초순경 육군직할 원호대(援護隊)로 전속되었다.
원호대는 상이군인을 모아놓은 부대이지만 이만율 일병은 거동이 가능하므로 원호대로 배치되자마자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만율 일병은 중공군의 5월 공세로 분대원과 함께 방어진지를 사수하다가 1951년 5월 29일 적 총탄을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율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6-ㄴ-01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