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우(李滿雨)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702

공훈사항

이만우 경사는 1932년 2월 6일 경북 청도군 매진리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태전사 사령부 소속으로 재직 중 청도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이 남으로 진군하자 청도경찰은 지역 내 주요시설 경비, 청도-경산, 청도-창녕을 잇는 주요 도로 경비,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의 남진이 계속되자 청도경찰은 남으로 후퇴하여 8월 초 고령군에 도달하였으며,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기여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9월 16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자 청도경찰은 지역 내 치안유지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잔적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전선이 단절된 공산군과 북한 유격대는 태백산맥 일대로 잠입했다. 이들은 경북 지역, 강원 북부지역, 충북 동부지역에 걸쳐 있는 태백산을 근거지로 하여 군 주요 수송로인 경부선·중앙선·포항선 철도 차단과 대구·청주를 비롯한 시가지 공격 등 후방교란을 획책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1950년 12월 16일 태백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이하 태전사)를 설치하여 공비들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태전사는 주력부대인 제200부대와 제207부대, 경북 전투경찰대, 강원 남부와 충북 동부 지역의 경찰서 병력, 주요보급로 경비를 담당하던 서울 제106대대로 편성되었다. 이 경사는 1950년 12월 16일 태전사 경북 전투경찰대에 편성되어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 작전기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을 설정하여 전국적으로 공비섬멸작전을 시행토록 했다. 이 경사는 제1차-제2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공비 수 명을 사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제2차 공비토벌 작전을 마친 이 경사는 청도에 출현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식량을 약탈하는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 7월 1일 투입되었다. 이 경사가 소속된 경북 전투경찰대는 7월 2일 청도 덕산리에서 수십 명의 공비들과 조우하여 피·아 간 교전이 벌어졌다. 이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공비 3명을 사살하고 계속 작전을 수행하던 중 공비가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우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08묘역-2판-17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3-ㅋ-064)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