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용(李萬用)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62775
  • 전몰일자 : 19500805

공훈사항

이만용 일병은 경상남도 김해군 장유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과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9년경 제3사단 제22연대에 입대했다. 이 일병은 1948년 11월부터 1950년 3월까지 경남·북 일대에 남파된 북한 유격대 소탕작전에 앞장섬으로써 북한군의 후방교란 기도를 분쇄하는 데 기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22연대는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6월 25일 오후 대구에서 이동하여 27일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봉일천 지구의 제1사단을 증원하고, 제3대대는 김포로 출동하여 김포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되었다. 연대(-)는 고양 일대에서 적과 접전을 벌였으나, 서울이 함락됨에 따라 29일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했다. 철수 도중 개화산에 배치된 북한군과 교전을 벌여 이들을 격퇴한 후, 양화-영등포를 경유하여 시흥으로 이동했다.
연대는 6월 30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의 혼성제3사단에 편성되어, 7월 1일 금곡리에서 북한군 제3사단과 일전을 벌여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다. 7월 3일 연대는 제1사단에 배속되어 풍덕천 일대의 188고지에 배치되었다. 7월 4일 적 3사단의 선두부대가 제1사단 예하의 제12, 13연대에 일격을 당했으나, 곧이어 주력이 제22연대에 집중 공격을 가했다. 계속되는 전투와 철수로 이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나, 조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려 결국 수원, 천안 일대로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연대는 조치원-청주-보은 일대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적의 남진을 저지했다.
동해안 축선의 위협이 증가됨에 따라 연대는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57호(7.20. 발령)에 의거 제3사단으로 원대 복귀했고, 23일 대구로 이동하여 재편성을 했다. 7월 24일 영덕 남방의 강구에 도착한 연대는 26일 강구 북방의 181고지와 207고지를 탈취하고, 곧이어 30일 제23연대가 탈취당한 영덕을 다시 탈환했다. 이후 8월 7일까지 연대는 이 일대에서 피·아간에 뺏고 뺏기는 혈전을 계속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며 진지를 지켜내다 적탄에 맞아 8월 5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용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6면-05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3-ㄷ-06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