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엽(李萬燁)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사
  • 군번 : 0336290
  • 전몰일자 : 19500625(육군 제2훈련소가 창설된 이후인 1950-08-25로 조정함.)

공훈사항

이만엽 중사는 전라북도 군산시 삼학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1949년 1월경 제7여단 제17연대에 입대했다. 연대는 동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에 예속되었고, 동년 11월 15일 옹진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되어 옹진반도의 은파산 일대에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후 북한군의 도발이 잠잠해지면서 1950년 3월 1일부로 옹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옹진반도에는 제17연대만 남아 방어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면적인 포격에 이어 침공했으며, 옹진반도에는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와 제3경비여단을 투입했다. 연대는 병력 및 화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지연전으로 저항하다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6월 26일 아침 부포항에서 해군 LST에 승선하여 인천으로 철수했다. 첫날 전투에서 이 중사는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고, 8월 중순에 회복되어 육군 제2훈련소 조교로 배치되었다.
한편,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으나, 7월 17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다. 8월 1일 이 교육대가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고, 8월 14일 육군본부 직할로서 대구에서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같은 날 부산에서 제2훈련소가 제1·5교육대 병력과 제9교육대 일부 병력을 기간으로 창설되었다.
이 중사가 훈련소에 배치될 당시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맞이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제2훈련소는 창설과 동시에 신병교육에 들어갔다. 8월 초순 낙동강 선으로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부산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당시 미군의 지원물자가 대부분 부산항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고, 부산에는 각종 지원부대와 시설 등이 밀집되어 있어 적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전선 상황이 워낙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제2훈련소는 교관·조교를 비롯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게릴라들의 공격에 대응해 왔다. 8월 25일 적 게릴라들이 훈련소를 습격했고, 이 중사와 기동타격대원들은 이에 대응하여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 중사는 소대원을 이끌고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엽 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4판-4면-15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9-ㄷ-06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