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식(李萬植)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320276
  • 전몰일자 : 19501030

공훈사항

이만식 이등중사는 경상북도 영일군 지행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50년 2월 중순, 서울 용산의 제2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연대는 1950년 6월 12일에 홍천으로 이동하여 제8사단으로부터 홍천 북방의 42km 방어지역을 인수하고 제6사단에 예속되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남침을 감행했을 때, 제2연대 장병들은 어론리 북방의 주저항진지에 투입되어 인제에서 홍천에 이르는 축선에서 적 부대의 진출을 3일간이나 지연시켰다. 연대 장병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6월 29일에 홍천에서 철수하여 횡성-원주를 거쳐 7월 2일에는 충주로 이동했다.
이만식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2연대는 7월 한 달 동안 충주-문경-함창 축선에 지연전을 하고, 8월 3일에 낙동강방어선으로 이동하여 용기동∼교안동∼307고지를 잇는 고지군을 점령하고, 이곳에서 8월 7일에 2개 대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치열한 교전 끝에 격퇴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중상을 입고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다행히 빨리 회복되어 그는 8월 하순 대구에 있는 대구방위사령부로 전속되어 경비부대(제5279부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대구로 이동함에 따라 대구 방위가 급선무가 되었다.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은 북한군의 공세에 보조를 맞춰 주요시설에 대한 습격 및 파괴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7월 24일 제2사단을 해체하면서 육본 직할로 대구방위사령부를 설치했고, 대구 지역에 대한 경비를 위해 대구 동촌비행장에서 경비대대를 창설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 8월; 9월 공세를 맞이하여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격퇴하고, 9월 16일부터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대구 북방까지 진출했던 북한군은 북으로 후퇴했고, 미처 후퇴하지 못한 패잔병들은 팔공산 등지로 숨어들어 유격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0월 30일에 팔공산 일대에 적 게릴라가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만식 이등중사가 소속된 경비대대는 즉각 출동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분대장으로서 용감하게 전투하다가 적들의 기습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식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7판-4면-15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3-ㅋ-08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