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수(李萬洙)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1874
  • 전몰일자 : 19510620

공훈사항

이만수 일병은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0년 10월경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5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이어 제301공병교육대에서 공병 주특기 교육을 받은 후, 제1103야전공병단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제1103야전공병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후방지역에서 잔적 소탕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동 단은 북진작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50년 11월에 창설되어 제3군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3군단은 1950년 10월 16일, 서울에서 신편된 제5사단(1950. 10. 8. 재창설, 대구)과 제11사단(1950. 8. 27. 창설, 영천)을 배속받아 창설되었다. 창설 후 군단은 서울-춘천-인제-양양 선 이남의 유엔군 후방지역작전을 담당하여 12월 10일까지 공비토벌작전을 했다.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38도선으로 철수하면서 제3군단은 12월 중순 양평으로 이동하여 제2·5·8사단을 배속받아 최초로 가평-춘천 정면의 전선에 투입되었다.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 3차 공세 때 군단은 영월로 철수했고, 이후 군단은 제3·7·9사단으로 영월전투, 홍천전투, 횡성전투를 수행했다. 그리고 제3·7사단으로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영월-평창-현리 축선으로 진격하여 4월 중순 화천저수지 남방의 한계리-가리산까지 진출한 후, 중공군 4월 공세를 매봉, 한석산 일대에서 격퇴했다.
제3군단은 중공군 5월 공세 때 강원 인제군 현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하진부리 일대로 철수했다. 현리전투 결과로 5월 25일 제3군단이 해체되고, 제1103공병단은 육군본부 직할로 전환되어 후방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공병단은 전투 병력의 신속한 기동을 보장할 수 있도록 도로와 교량 보수에 주력하면서, 때로는 직접 전투에 투입되어 적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 일병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양한 임무를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그는 1951년 6월 20일 주문진 일대에서 주보급로 보수 작업 중에 적의 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6판-8면-13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6-ㅊ-03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 전사자 명부에는 제203야공단 소속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 부대는 없는 부대이므로 유사한 제1103야공단으로 수정함.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