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수(이만수)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208323
  • 전몰일자 : 19501031

공훈사항

이만수 일병은 출생 일자 및 장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에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 등을 고려하여 작성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1950년 7월 중순, 경북 대구의 제25교육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에 제6사단 공병대대로 배치되었다.
이만수 일병이 공병대대로 전입했던 8월 중순, 제6사단은 국통산과 324고지, 169고지 일대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신령 북방의 방어진지로 철수하여 북한군의 9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후 제6사단은 9월 16일에 조림산 일대에서 강력히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멸하고, 9월 23일부터 도망가는 북한군에 대해 추격에 들어갔다. 사단은 9월 30일에 원주를 탈환하고, 10월 5일에는 춘천 북방의 모진교에서 38선을 돌파했다. 계속 화천을 거쳐 김화–신고산–성천 방향으로 진격하여 10월 17일에는 양덕을, 19일에는 성천-순천을, 23일에는 희천을 점령했다. 이곳에서 유엔군은 10월 24일에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를 실시했다. 이만수 일병이 소속된 공병중대는 북진작전 동안에 제7연대의 선두에서 장애물 개척 임무를 수행하여 연대의 진격 속도를 높였다.
제7연대는 10월 24일에 희천에서 압록강 변의 초산 방향으로 공격했다. 장병들은 통일을 눈앞에 둔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계속 진격하여 10월 26일에 초산을 점령하였고, 오후에는 바로 국경선 경비 임무에 돌입했다. 이때 중공군은 은밀히 압록강을 건너 적유령 산맥 일대에 은거하다가 10월 26일에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차단했다. 이에 제7연대는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포위망을 돌파하며 험준한 산길을 통해 후방으로 철수를 감행했다.
이만수 일병이 소속된 공병중대는 압록강을 향해 진격할 때 장애물 개척 임무를 수행하며 제7연대의 공격을 선도했으나, 중공군에게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는 포위망 돌파가 우선 급했다. 공병중대는 10월 31일에 겹겹이 싸인 포위망을 돌파하면서 중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받았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78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6-ㄱ-00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