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수(李晩洙)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9801935
  • 전몰일자 : 19501002

공훈사항

이만수 이병은 1929년 3월 22일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던 때인 1950년 8월 중순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만수 이병은 전선에 배치되어 다부동 전투에 투입되었다. 1950년 8월 29일까지 고령에서 함창에 이르는 낙동강 전선에 북한군 제2군단(제3, 제13, 제15사단)을 투입하여 대구로 집중하였으나 이 이병과 사단 병력이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전차를 파괴하는 등 저지 사격을 가하면서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그들의 막강한 저항에 부딪친 북한군은 현풍-왜관-328고지-수암산-유학산-신주막 선에서 저지되었다.
사단은 8월 30일 전투지경선을 조정하고 741-팔공산 북방 중앙선까지 담당하여 대구 북쪽의 방어진지 편성에 주력하였으며, 이만수 이병과 제1사단 장병들은 팔공산 북방 정면에 배치되었다. 9월 4일 북한군 제3사단이 부대 간격을 따라 왜관-다부동도로 남쪽 464고지로 침투하고 있었으며, 좌측방 왜관도 무인지경이 되고 우측방 에서는 북한군 제13사단이 다부동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가산으로 진출하려던 이 이병과 사단 병력은 다음날 5일까지 북한군 제1사단 1개 대대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철수하고 말았다. 이만수 이병과 사단 병력은 다부동 일대의 정해진 목표를 향해 수차례 공방전을 전개하였고, 연일 반복되는 공방전에서 매일 평균 600여명의 손실이 발생하여 병력이 날로 감소하였다. 이 이병과 사단 병력은 가산을 탈환하고자 9월 중순까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방어선을 지켜냈다.
이만수 이병을 비롯한 장병들은 9월 25일 낙동리에서 도하를 완료하고 추격 작전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부대 장병들은 선산-상주-보은을 거쳐 미원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소백산맥의 험한 준령을 따라 북으로 도주를 시도하던 북한군 패잔병을 추격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소탕하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던 이만수 이병은 1950년 10월 2일 38선 진격전에 참가하여 임무를 완수한 후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수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40판-2면-06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2-ㄱ-01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