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수(李萬秀)

  • 군별 : 육군
  • 계급 : 상병
  • 군번 : 0343847
  • 전몰일자 : 19500815

공훈사항

이만수 상병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11월 중순, 서울 용산의 제19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연대는 1950년 4월 19일에 원주로 이동하여 제6사단에 예속되어 사단의 예비로서 교육훈련과 부대정비에 주력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6월 25일 새벽 기습남침을 감행했을 때, 이만수 상병이 소속된 제19연대의 주력은 원주에서 기차로 청량리를 거쳐 6월 26일 새벽 5시에 춘천에 도착했다. 그는 연대 장병들과 함께 제7연대를 증원하여 춘천지역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사단 명에 의거 6월 27일에 홍천으로 이동하여 이 지역의 제2연대를 증원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후 6월 30일 오후에 홍천에서 원주로 철수했다. 이후 연대는 7월 1일 야간에 이천지역으로 긴급히 투입되어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후 7월 4일에 안성을 거쳐 진천으로 철수하였고, 7월 9일에 수안보로 이동하여 사단에 합류했다. 이후 제6사단은 육본 명령에 의거 7월 12일 조령과 이화령을 포함한 문경지역 방어에 돌입하여 문경-점촌-함창 축선에서 북한군 제1, 제13사단을 맞아 7월 말까지 지연전을 실시했다.
제19연대 장병들은 7월 31일에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에 의거 8월 1일 새벽에 낙동강을 건너 8월 3일에 용기동 북쪽 2km 지점 양곡동 일대의 능선에 배치해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8월 6일에 용기동~양곡동간 능선 일대에서 방어하던 중에 적의 공격을 몇 번은 격퇴했으나, 결국은 진지에서 후퇴하여 선돌주막 남쪽의 236고지로 철수했다.
이만수 상병이 소속된 대대는 8월 8일 오전 11시경에 2개 대대 규모의 적이 선돌주막 부근까지 진출할 때에 강력히 저항하여 격퇴하고, 이어서 즉각적인 역습으로 적을 선돌주막 북쪽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후퇴했던 적들이 병력과 화력을 증강하여 8월 9일 새벽 3시경에 재공격하자, 연대 장병들은 236고지에서 계속 방어하는 것은 피해만 증가한다고 판단하여 이곳에서 철수하여 조동과 외곡동 일대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이후 연대는 8월 13일에 군위, 의흥을 경유하여 매봉산과 산운동 일대로 철수해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적들은 8월 15일에도 계속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아군은 강력한 저항으로 격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수 상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5판-3면-02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9-ㄲ-02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