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손(李萬孫)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710

공훈사항

이만손 순경은 1918년 5월 11일 황해도 옹진군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경기도경 인천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조치원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순경은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북한 유격대가 태백산 일대에 계속 침입하자 치안국은 시흥 육군보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경찰 간부들을 중심으로 4월 20일 제8·제9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여 강원도 영월과 춘천지역에 배치하는 등 전·후방의 치안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6월 10일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38도선 접경지역인 경기·강원 2개 도에 비상경비태세 강화명령을 내려 북한의 군사동태를 잘 살피도록 하였다.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인천경찰은 연안경비를 강화하며 인천-서울, 인천-김포, 인천-부천, 인천-광명, 인천-시흥 간 주요 보급로를 경비하는 한편, 주요 시설과 철도경비를 강화했다.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주공부대는 7월 3일 한강을 도하하여 경부가도를 따라 남진하였다.
인천경찰은 인천지역에 침입한 북한군을 격퇴하며 지연전을 펼쳤다. 인천경찰은 시흥-화성을 거쳐 7월 2일 평택에 도달했다. 비상경비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평택에 집결되어 있던 이 순경을 포함한 경기경찰병력 300명이 안양과 수원에 배비되었다가 7월 4일에는 천안-수원 간 철도경비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의 남진이 계속되자 아군 군경부대는 계속해서 후퇴를 거듭했고, 인천경찰은 7월 9일 조치원에 도달했다. 인천경찰은 이곳에서 부대를 재편성하여 거점방어와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7월 10일 북한군의 진격으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 순경은 적을 격퇴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손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50판-5면-20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4-ㅋ-08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