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성(이만성)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상사
  • 군번 : 6700170
  • 전몰일자 : 19501127

공훈사항

이만성 이등상사는 경기도(現 인천광역시) 옹진군 옹진읍 온천리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9년 7월 14일 입대하여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육군통신학교에서 통신 주특기교육을 수료한 후 통신학교 조교요원으로 교도대에 배치되었다. 이만성 이등상사는 통신 근무 및 교육훈련에 전념했다.
6·25전쟁이 발발 후 곳곳에서 통신이 두절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육군통신학교에 전방 사단과의 통신을 소통시키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에 육군통신학교 교도대는 즉각 제1사단 지역으로 출동하여 육본과의 통신 소통을 위해 노력했다.
이만성 이등상사는 제12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파평산 지역으로 출동하여 통신 소통을 위한 유선 가설 임무를 수행했다. 연대는 파평산에서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국군은 한강방어선도 무너지고 후퇴하여 육군본부는 수원에서 대전으로 이동했다. 미 지상군이 투입되었지만 지연전을 펼치면서 계속 철수하여 육군본부는 다시 대구로 이동하였고, 대전은 1950년 7월 20일에 함락되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8월 1일부로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했다.계속해서 연대는 다부동-군위 일대에 투입되어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연대는 8월 15일부터 총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전차 7대를 앞세운 북한군 연대규모의 공격을 받아 복곡 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연대 병력은 9월 28일 서울 수복작전에 기여하고 9월 말 38도선에 도달했다.
10월 9일에는 38도선을 돌파해 19일 평양에 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만성 이등상사와 부대원들은 10월 23~24일 안주 일대에서 청천강을 도하 한 후 10월 25일 운산에 도착했다. 연대는 25일 오전 10시 30분에 운산에서 수풍호로 진출할 목적으로 군단에서 배속된 전차를 앞세우고 2개 연대병진 대형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청천강 남쪽의 신안주 부근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연대는 11월 24일 북한군 병참선의 요충인 평안북도 태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태천을 남쪽과 동쪽에서 포위하게 되었다. 이만성 이등상사는 11월 27일 태천에서 진지강화 및 재편성 중 소대원을 통제하며 유선을 정비하다가 중공군 침투부대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성 이등상사의 혁혁한 전공을 표창하여 충무무공훈장(훈기번호 2008 국)을 추서하고,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3판-3면-32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4-ㅈ-024)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