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선(李萬善)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719

공훈사항

이만선 경사는 1921년 4월 6일 충북 옥천군 군북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충남도경 태안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곡성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경사는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치안국은 전시 비상경비총사령부 체제로 전환했다.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충남경찰 비상경비사령관은 예하 경찰관서에 특별경계로 적의 오열과 지방공비를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충남경찰은 군의 요청에 따라 경부선 주보급로 경비 임무를 수행했으며, 7월 11일 제1대대(충남·서울경찰)를 청양에, 제2대대(충남·경기경찰)를 홍산에 배치하여 청양-대천 선에서 군과 함께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1대대는 청양에 제1중대, 정산에 제2중대, 대천에 제3중대를 배치했으나 예산과 홍성에 적이 침입하여 홍성-대천 지역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제1중대는 예산 방면에서 남진 중인 적 유격대를 급습하여 20명을 생포했고, 홍성군 산성면에서는 적과 교전하여 포로 50명, 사살 2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7월 15일 제1대대장은 제1중대 130명을 직접 지휘하여 대천 방향으로 진격하여 집결해 있는 수십 명의 북한군을 포위 급습하여 사살 3명, 포로 2명의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 전투에서 지방 공비 40명을 사살했다. 제1대대는 7월 16일 청양으로 복귀하였으나 청양경찰서가 이미 후퇴하였으므로 대대장은 병력을 이끌고 전북 곡성으로 후퇴했다. 태안경찰은 홍성-보령-서천을 거쳐 곡성까지 후퇴하면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며 오열 색츨 임무를 수행했다. 7월 19일 태안경찰이 북한군과 조우하면서 쌍방 간 교전이 벌어졌다. 이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적을 격퇴하던 중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선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5-ㄲ-05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