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상(李萬相)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30727

공훈사항

이만상 경사는 1925년 10월 10일 경북 대구시 덕산동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경남도경 합천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덕유산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경사는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아군 군경부대가 낙동강 방어선을 편성하기까지 합천경찰은 주요 보급로·시설 경비, 오열 색출,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임무를 수행했다. 중부와 서남부 측에서 북한군이 진격하자 합천경찰은 경남경찰부대의 일부로서 7월 21일부터 7월 30일까지 전북경찰과 함께 호남과 영남을 잇는 관문인 육십령 고개에서 방어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경남경찰은 함안과 마산으로 철수하여 낙동강 방어작전에 참여하여 적을 저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전개되었다. 함양경찰은 9월 28일 함양경찰서를 수복하고 치안유지에 힘쓰는 한편 잔적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패잔병들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의 공비섬멸 작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 지침에 따라 경남경찰은 이 기간에 공비섬멸작전을 수행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이 경사는 백야전사의 일원으로 편성되어 제1기(1951.10.02.-12.14.), 제2기(1951.12.16.-1952.01.04.), 제3기(1952.01.04.-01.31.), 제4기(1952.02.04.-03.14.)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이 경사는 합천경찰서에 복귀하여 지역 내 치안유지, 오열 색출, 주요 시설 경비, 잔적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1953년 7월 26일 덕유산에 수십 명의 공비들이 출현하여 양민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함양경찰이 현장에 출동하여 대응에 나섰다. 7월 27일 이 경사는 공비들을 격퇴하기 위해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상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6-ㅁ-09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