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봉(李萬奉)

  • 군별 : 육군
  • 계급 : 상병
  • 군번 : 1107694
  • 전몰일자 : 19500625

공훈사항

이만봉 상병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답십리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광복 후 대한민국과 자유를 지키고자, 1948년 6월 초순경 경기도 양주에 주둔 중인 제1여단 제1연대로 현지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소총병으로 배치되었다.제1여단은 1949년 2월 1일 수도여단으로, 5월 12일 수도사단으로, 6월 10일 제7사단으로 개칭되어 동두천-포천 축선의 38도선 방어임무에 투입되었다.
그 후 제1연대는 제7사단 예하 연대로서 경기도 포천 일대 마차산-소요산을 연결하는 21㎞의 책임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연대는 1개 대대만을 38도선 경비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나머지 연대는 교육훈련에 집중하게 했다. 그러던 중 이만봉 상병은 1950년 6월 초순경 부대조정에 의거 육군 참모학교 조교로 전속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동두천, 포천 축선에 주공인 제1군단의 주력을 투입했다.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제203전차연대 1개 대대를, 포천 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했다.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부족한 장비와 병력으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직할부대를 전투부대로 동원해 의정부지구에 중점을 두면서 서울방어를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 육군은 우선 육군본부 직할의 모든 재경부대를 동원해 전방의 제1사단과 제6사단,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증강했다.
따라서 6월 25일 수도사령부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배속한 데 이어 오후에는 제18연대(-1)마저 추가로 배속하였으며, 제8연대를 제6사단에 배속해 가평지구로 투입했다. 또한 서울 특별연대는 제1사단에, 전투경찰 1개 대대가 배속된 육사생도대대는 제7사단에, 포병학교 제1교도대대는 제1사단과 제6사단 그리고 제7사단에, 제2교도대대는 제7사단에, 독립기갑연대 제1대대는 제1사단과 제6사단 그리고 제7사단과 제8사단에 배속하였으며, 저녁에는 육본 장교연대 및 참모학교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시켜 창동 지역에 배치했다.
이만봉 상병과 일부병력은 철수와 방어로 이어진 수세적인 전투만 전개하던 중 일시공격으로 전환해 혼성대대 병력이 동두천을 탈환하고 소요산까지 진출하였으나, 곧 이은 북한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의정부 방면으로 철수했다. 이만봉 상병은 전쟁 첫날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적과 교전 중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봉 상병의 혁혁한 전공을 표창하여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4971 국)을 추서하고,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7판-6면-07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9-ㅎ-064)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