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복(이만복)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711447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이만복 일병은 전라북도 임실군 공사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0년 7월 중순경 제1교육대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병참중대에 배치되었다. 제1교육대는 전라북도에서 신병모집 임무를 수행하던 제7사단 제3연대를 1950년 7월 16일부로 개칭한 부대였다.
제7사단은 7월 20일 민부대로 개칭되어 호남지역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남진을 지연하다 제5연대로 재편되었고, 사단은 8월 20일 대구에서 제3·5·8연대를 예하부대로 하여 재창설되었다. 북한군 9월 공세 때 사단은 영천전투에서 사력을 다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적 제15사단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때 사단은 미 제8군 예비로 경주에 집결해 있다가 9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다. 사단은 추격작전 때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수안보-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서울 청량리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사단은 김화를 거쳐 11일 평강에 진출하여 잔적소탕을 한 후에 계속 진격하여 17일 곡산에 도달하여 잔적소탕작전을 했다. 20일 평양이 탈환되자, 사단은 21일 평양 북방의 기림리, 노산리 일대까지 진출하여 육군본부 직할로 전환되었다. 사단은 29일까지 평양과 그 북방 일대의 잔적소탕 임무를 수행했다.
사단은 제2군단에 배속되어 11월 초순 평안남도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전투에서 중공군을 격퇴했다. 사단은 11월 22일 묘향산을 공격했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이후 사단은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2월 15일 춘천 동북방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신정 공세)를 시작했고, 사단은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사단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급식 추진에 앞장서다 1951년 1월 1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복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위패(33판-40면-21779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7-ㅋ-09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