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복(李萬福)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717

공훈사항

이만복 경사는 1928년 10월 23일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강원도경 원주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단양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경사는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강원도 비상경비사령관 윤명문 경무관은 전 경찰로 하여금 관내를 사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합동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6월 27일 홍천으로 공격했던 북한군 제7사단의 일부가 춘천에 지원되었으나 이들은 군경부대가 춘천에서 철수한 다음인 6월 28일에야 춘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3일 동안 춘천을 지켜냈던 춘천서 병력은 철수와 동시 전투경찰 제2대대에 편입되어 홍천-횡성-원주-음성으로 이동했다. 원주경찰은 지역 내 보급로 경비, 주요시설 경비, 철도경비, 피난민 통제, 오열 색출, 치안유지와 함께 북한군의 남진에 대비하여 작전태세를 강화하였다.
7월 1일 강원경찰은 영월과 울진을 제외하고는 군의 작전에 따라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7월 2일 오후 늦게 평창 방면에서 적의 보·전 부대와 동해안에 상륙한 제766유격부대가 원주를 협공했다. 원주경찰은 야음을 이용하여 적의 포위를 벗어나 3일 새벽에 제천 신림리로 후퇴했다. 7월 7일 새벽 3시 제천 신림리 고개에 배치된 원주경찰의 전초가 적의 선두부대를 격퇴했다. 그러나 적 후속병력의 증원으로 7월 5일 새벽에 제천 이남으로 후퇴를 거듭했다. 원주경찰은 후퇴를 하면서 피난민 구호·통제, 오열 색출임무를 수행했다.
7월 16일 원주경찰은 단양을 지나 소백산 자락의 두음리에 도달하여 적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원주경찰은 7월 17일 소백산을 넘으려는 적을 발견하여 피·아 간 교전이 벌어졌다. 이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적을 격퇴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복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5-ㄲ-01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