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범(이만범)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08392
  • 전몰일자 : 19510201

공훈사항

이만범 일병은 경상남도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18일,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미 제8군으로 배치되었다가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 제7사단 제17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만범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때, 미 제7사단은 서울탈환작전을 완료하고 추후 원산상륙작전을 위해 부대를 정비하고 있었다. 사단은 원산상륙작전계획에 의거 10월 6일부터 철로와 차량을 이용하여 부산으로 이동하여 상륙함에 승선 준비를 했다. 이후 사단은 승선을 마친 다음에 부산에서 10월 29일에 출항하여 원산 상륙을 취소하고 11월 8일에 함경남도 이원으로 행정적인 상륙을 했다. 이는 국군 제3사단이 육상으로 공격하여 10월 10일에 먼저 원산을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이만범 일병이 소속된 미 제7사단은 11월 25일에 혜산진을 점령하고 국경선 방어로 전환했으나, 이 무렵에 중공군이 장진호로 진격하는 미 해병 제1사단을 포위하고, 원산까지 진격하여 미 제10군단의 후방을 차단했다. 이에 사단은 11월 27일에 혜산진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사단은 함흥으로 이동하여 외곽 교두보 방어선을 점령하고 있던 미 제3사단을 지원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며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자 했다. 미 제7사단은 12월 21일에 마지막으로 남은 미 제3사단의 엄호 하에 흥남항을 출발항여 부산항에 도착했고, 이후 대구로 이동하여 부대 정비를 했다.
이어 중공군이 12월 31일 야간에 총공세로 서울을 점령하자, 유엔군은 위기를 느끼고 평택-삼척 선으로 철수했다. 당시 사단은 1951년 1월 7일에 대구에서 정비하다가 제천-단양 일대로 북상했다. 중공군의 공세는 1월 12일에 미 제2사단이 원주를 사수함으로써 저지되었다. 이후 사단은 평창 남서쪽 주천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추후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한편 북한군 게릴라들이 평창-제천-단양-안동 일대로 침투하여 아군의 병참선을 적극적으로 교란했다. 이만범 일병이 소속된 부대는 2월 1일에 보급품 수송 차량을 습격하는 북한군 게릴라를 발견하고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미군장병들과 함께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범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128-ㄹ-00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