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동(李萬同)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2703718
  • 전몰일자 : 19511013

공훈사항

이만동 하사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1949년 10월 하순, 전남 순천의 제15연대로 입대했다. 이후 제15연대가 1950년 5월 3일에 전북 전주로 이동할 때, 그는 강원도 춘천의 제7연대로 전속되었다. 당시 제7연대는 제6사단에 예속되어 있었고, 춘천에 본부를 두고 화천-춘천 축선을 담당했다.
이만동 하사가 소속된 제7연대는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 침략한 북한군의 공격을 맞아 3일간 춘천을 지키고, 이후 원주-충주-문경-함창을 연결하는 축선에서 7월 한 달 동안 지연전을 실시했다. 그리고 8월부터 9월 중순까지 낙동간 선의 용기동에서 의흥-신녕으로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좌절시켰다. 유엔군은 9월 16일부터 일제히 반격하여 북한군을 추격했다. 당시 제6사단은 거침없는 진격으로 10월 말에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이 시기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제6사단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전곡 및 동두천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서울을 목표로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감행했고, 이에 제6사단은 방어진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1951년 1월 1일 오전에 적의 측방공격에 위협을 느껴 철수하였다. 사단은 의정부-창동을 거쳐 철수하였으며, 2월 초순에 문막 북쪽의 판대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2월 12일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하고, 즉각 반격하여 4월 21일에 사창리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와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로 용문산까지 철수했다가 5월 20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사단 장병들은 계관산-북배산-지암리-춘천 동북방-화천 방향으로 공격하여 5월 28일에 화천을 점령했다. 이어서 이만동 하사가 소속된 제7연대는 6월 5일부터 992고지-취봉-백암산 방향으로 공격하여 6월 12일에 적근산-주파령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을 증강하는데 몰두하자, 유엔사는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 각 부대에 공세적인 작전을 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제6사단은 우선 방어진지 전방의 819고지를 탈취하고, 금성천 분지를 확보하기 위해 교암산을 탈취하기로 했다. 사단은 10월 13일에 공격했으나 중공군의 저항도 완강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이만동 하사는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동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35491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23판-4면-1257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4-ㅎ-04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