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달(李萬達)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122496
  • 전몰일자 : 19510708

공훈사항

이만달 하사는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9월 초순,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19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만달 하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10월 초순, 제6사단은 10월 6일에 38선을 돌파했고, 계속 김화-성천-순천-개천 방향으로 추격하여 10월 20일에 희천에 도착했다. 이후 유엔군은 압록강을 향해 두 차례에 걸친 총공세를 펼쳤으나, 이때마다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큰 피해를 받고, 결국은 38도선으로 철수했다. 당시 제6사단은 12월 11일에 동두천 북방의 전곡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서울을 향해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감행했다. 국군은 유엔군은 1월 4일에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고 철수했다. 당시 제6사단은 1951년 1월 1일 야간에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서울 창동을 거쳐 1월 6일에 장호원 부근의 적산리로 이동했다.
중공군은 2월 12일에 전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일명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실시했다. 사단은 문막 북쪽의 판대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점령하여 돌파구 확장을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후 3월 22일부터 북배산-수덕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4월 21일에 대성산-육단리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을 재개하여 사창리까지 진출했다. 이때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로 후방이 차단되어 큰 피해를 받고 가평을 거쳐 4월 27일에 용문산 일대로 철수했다.
중공군은 5월 16일부터 5월 공세를 시작했으나, 사단은 전초인 제2연대가 전면방어로 거부하고, 제19연대와 제7연대는 5월 20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5월 28일에 화천저수지까지 진출했다. 당시 이만달 하사가 소속된 제19연대는 사단의 조공으로 6월 5일부터 취봉-백암산 방향으로 공격하여 6월 11일에는 취봉을 확보하고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사단 장병들은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수색작전 활동에 집중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7월 8일 작전지역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달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773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4-ㅂ-02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