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길(李萬吉)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6541
  • 전몰일자 : 19501209

공훈사항

이만길 일병은 경상북도 대구시 남산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0년 9월 10일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5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물리치고 반격 중이었고, 사단은 미 제8군 예비로서 경주에 집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추격작전 때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청량리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연대는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비호산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했다. 3
11월 3일 연대는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연대 장병들은 7일까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연대는 비호산을 끝까지 지켜냄으로써 유엔군이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1월 14일 연대는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연대는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연대는 미 제8군 철수계획에 따라 12월 3일 승호리 일대로, 6일 신계를 거쳐 시변리로 철수했고, 계속해서 연천을 거쳐 12월 15일까지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이 일병은 적의 습격을 받고 12월 9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9판-5면-00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0-ㄱ-09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