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길(李滿吉)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402505
  • 전몰일자 : 19510315

공훈사항

이만길 일병은 1930년 7월 6일에 경상북도 포항시 송도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초,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통신대로 배치되었다. 그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춘천에 위치하며 제7연대를 직접 지원하고 있었다.
이만길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9월 초순, 제6사단은 신녕 북방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저지하고 있었다. 얼마 후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9월 16일부터 전 전선에서 반격으로 전환했다. 당시 제6사단은 함창-충주-원주-춘천 방향으로 진격하여 10월 5일에는 춘천 북방의 모진교에서 38도선을 돌파했다. 계속 화천-김화-마식령-성천-희천 방향으로 진격하여 10월 23일에는 희천을 점령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4일에 압록강을 향한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와 11월 24일에 압록강 및 두만강을 향한 2차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실시했으나, 그때마다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큰 피해를 받고 38도선으로 철수했다. 당시 제6사단은 덕천-시변리-고랑포 축선으로 철수하여 이때 12월 11경에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만길 일병이 소속된 통신소대는 부대 이동할 때마다 사단과 연대 간의 통신망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대규모 병력을 이룬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서울을 목표로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시작했다. 이에 제6사단은 방어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다음날인 1951년 1월 1일 새벽에 후방이 차단되어 위험에 처하게 되자 방어진지에서 철수했다. 이후 사단은 1월 6일에 장호원 부근의 적산리로 이동했다가 방어배치 조정에 의거 2월 1일에 문막 북쪽의 판대리 일대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제6사단은 2월 12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 시에 방어진지를 사수함으로써 돌파구 확장을 방지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사단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3월 중순에 홍천강에서 북한강까지 진출했다. 이 시기에 이만길 일병이 소속된 통신소대는 사단과 연대 간의 통신 소통을 위해 통신선을 매일 점검했다. 통신소대는 3월 15일에 통신선 선로 점검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의 습격을 받았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43-ㄷ-05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