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기(李萬基)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사
  • 군번 : 9501565
  • 전몰일자 : 19530629

공훈사항

이만기 중사는 1933년 4월 25일 경상북도 금릉군 부항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중사는 1950년 7월경 제5교육대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3사단 제22연대에 배치되었다.
연대는 7월 26일부터 9월 14일까지 동해안 축선의 강구, 영덕, 흥해, 포항, 형산강 일대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뺏고 뺏기는 공방전 끝에 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제3사단은 9월 23일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윤 중사와 연대 장병들은 강릉(30일)을 탈환하고, 10월 2일 38도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연대는 길주-백암-혜산진으로 북진하여 30일 한·중 국경선의 혜산진에 도달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12월 10일 흥남에서 해상 철수하여 구룡포에 상륙했다.
제3사단은 12월 20일경 소양강 변의 관대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연대는 평창, 횡성, 현리, 인제 일대를 오르내리며 1951년 5월까지 중공군 제3~5차 공세에 맞서 공방전을 펼쳤다. 사단은 5월 25일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양양, 간성 일대에 배치되어 제1군단의 후방지역작전을 담당했다. 사단은 10월 20일부로 미 제10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고, 양구 동북방 가칠봉 일대의 1,211고지에서 적과 공방전을 펼쳤다.
사단은 1952년 1월 12일 미 제9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백석산 서북방 임남 일대의 북한강~949고지~973고지~석장리 간의 전선을 담당했다. 중공군은 1953년 4월 2일 사단 주저항선인 949고지, 973고지의 전초가 설치된 689고지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연대 장병들은 중공군 제181사단의 공격을 맞아 12일까지 8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거듭한 끝에 이 고지를 지켜냈다.
중공군 제2단계 하계 공세(6월 공세) 때 적의 공격이 제5사단에 집중되자, 연대는 6월 11일부로 제5사단에 배속되어 14일까지 임남 일대의 883고지에서 중공군 제181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치렀으나, 결국 이 고지를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사단은 6월 15일 다시 제2군단에 배속되어 백암산 전방 북한강과 금성천 분기점 상의 529고지(관망산) 전투에 투입되었다. 중공군 제180·제201사단은 6월 25일 공격을 개시했고, 사단은 7월 3일까지 7차에 걸쳐 역습을 감행하며 치열한 공방전을 치렀으나, 끝내 이 고지를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 중사는 소대원을 독려하며 진지를 지켜내다 6월 29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기 중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45962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39판-4면-21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9-ㅈ-04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