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규(李萬奎)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2706073
  • 전몰일자 : 19511225

공훈사항

이만규 일병은 1931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던 1950년 11월 말,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에 제6사단 제2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만규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2월 하순, 제6사단은 동두천 북방 전곡-백의리를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와 유엔군의 반격작전, 그리고 ‘중공군의 4월 공세’로 사창리에서 용문산 일대로 철수하여 방어준비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제6사단은 5월 16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맞아 전초진지에서 전면방어로 격퇴하고, 5월 20일부터 반격했다. 사단은 계관산-북배산 방향으로 공격하여 적을 격멸한 뒤, 계속 춘천 동북방으로 공격하여 5월 28일에 화천저수지까지 진출했다. 이후 간단한 부대정비를 하고 6월 6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화천을 점령하고, 6월 15일에는 취봉(987고지)에 이어 백암산까지 진출했다. 이후 사단은 방어로 전환하여 제7, 제19연대를 당거리-782고지-1057고지에 배치하고, 이만규 일병이 소속된 제2연대는 백암산 남쪽 기슭에 배치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진행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을 증강하자, 유엔군사령관은 공산군을 휴전협상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군사적 압박이 필요하다고 보고 공세적인 작전을 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제6사단은 금성천 분지를 완전히 장악하라는 상급부대 작전지침에 의해 10월 13일에 공격을 개시했다. 제2연대는 예비로 후속하다가 10월 16일에 전방연대를 초월하여 중공군을 격파하고 21일에 교암산(770고지)까지 탈취했다.
이만규 일병이 소속된 제2연대는 사단 예비로 용호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군단 전선의 돌출부를 정리하기 위해 11월 17일에 방어진지 전방의 949고지를 공격하여 다음 날인 18일에 점령했다. 이후 장병들은 방어진지 보강과 수색 및 매복작전 위주로 실시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12월 25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규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24086육)를 추서하고, 그의 위패(32판-7면-03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5-ㅅ-00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