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만규(李萬奎)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628

공훈사항

이만규 순경은 1929년 4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경기도경 양주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양주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순경은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북한 유격대가 태백산 일대에 계속 침입하자 치안국은 시흥 육군보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경찰 간부들을 중심으로 4월 20일 제8·제9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여 강원도 영월과 춘천지역에 배치하는 등 전·후방의 치안확보에 노력을 기울였다.
6월 10일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38도선 접경지역인 경기·강원 2개 도에 비상경비태세 강화명령을 내려 북한의 군사동태를 잘 살피도록 하였다.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양주경찰서는 6월 25일 미명에 적의 공격을 받고 북방의 중요 거점으로 경계병력을 철수시켜 본서 병력과 더불어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양주경찰서 정면에는 육군 제12연대 제9중대가 약 15km 정면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중대와 중대 사이에 경찰경계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적은 1개 대대병력으로 양주경찰서 정면과 좌우측에서 포위공격으로 압박해 왔다. 국군진지를 돌파한 적이 경찰진지로 밀려들자 양주경찰은 덕도리 고지에 배치된 2정의 기관총으로 적을 공격하며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그러나 적이 후속 증원병력과 합세하여 재차 공격을 가하자 양주경찰은 덕정동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했다.
적은 2개 중대를 선봉으로 하여 남진을 계속했으며, 아군은 적을 저지하다가 전반적인 상황을 판단한 끝에 양주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6월 26일 새벽에 양주경찰은 의정부를 거쳐 6월 28일 하남에 도달했다. 전열을 정비하던 양주경찰은 북한군 3사단의 부대와 조우하여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 순경은 적을 격퇴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만규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4-ㅎ-07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